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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여름의 끝자락인데도 여전히 한 낮에는 더위가 그 맹위를 덜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요즘엔 서머셋 모옴의 책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는 책이에요. ‘인간의 굴레’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거의 다 읽어 가는 터라 모옴의 책들 중 또 뭘 가지고 왔던가 하고 집 책장을 둘러보던 중 한 구석에서 단편모음집 한권을 발견했습니다. 뒷편에 WhattheBook 스티커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이십여년 전 학부생이던 시절 쏘다니던 이태원에 있는 원서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으로 기억나네요. 그러고 보니 ‘인간의 굴레’ 이 책 또한 당신도 알고 있는 ‘정은문고’에서 귀갓길에 우연히 발견한 헌책이었네요. 원서 헌책들은 대체로 상태가 깔끔해서 좋아요. 아차! ‘정은서점’이군요. 일본도서만 죽어라 출판해대는 정은문고 이대표 때문에 자꾸 당신에게는 정은서점을 얘기할 때 정은문고라고 착각하게 되는군요. 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라 무료함을 달래고자 걸으면서 내가 읽어주었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있잖습니까? 그 출판사 말입니다. whatthebook은 코로나 사태를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폐업한 것 같아요. 거의 4년 동안 한 달에 한 두 번은 책을 구입하러 꼭 들렀었는데 졸업 후 직장인이 되어서는 이태원은 금요일 밤을 즐기거나 토요일 이른 아침 애프터 클럽을 목적으로 다니던 곳이 되어버렸고, 그나마도 구미로 온 후 가끔씩 서울 집을 갈 때도 자연스럽게 잘 가지 않게 되었으니 whatthebook은 안가본지 거의 십몇년이 되어버렸어요. 자연스럽게 잊어버렸으면서 막상 사라졌다고 하니 아쉬워하는 몰염치를 보니 한 때의 추억은 정말 기억 속에서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이쿠야 이 단편집의 단편 하나가 A Romantic Young Lady(:낭만적인 아가씨 정도로 해석합시다.)인데 첫 귀절이 또 머리를 때리네요. 모옴의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마치 실제인 것 같아서 내가 깊은 공감을 느낄만한 이야기를 너무나도 읽기 쉽게 풀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글이 많이 어렵지는 않아서 나름의 방식으로 의역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합니다. 아휴 그런데 저는 너무 자기 본위로 읽고 있기도 하네요. anyway 첫머리가 이 귀절들이에요. One of the many inconveniences of real life is that it seldom gives you a complete story. 우리에게 완벽한 결말을 가진 스토리를 주는 경우가 꽤 드물다는 것이 현실의 많은 곤란한 것들중의 하나이다. 실재하는 인생에서 달갑지 않은 것들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이 것은 좀처럼 우리에게 완벽한 결말을 가진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속의 많은 애로 사항중의 한 가지는 이 것이 우리에게 결말을 갖춘 제대로 된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경우가 꽤나 드물다는 것이다. Some incident has excited your interest, the people who are concerned in it are in the devil's own muddle, and you wonder what on earth will happen next. 어떤 사건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고,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귀신이 스스로가 만들어 놓고도 당황스러워할 수렁같은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도대체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하는 의구심을 우리는 갖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마치 악마가 만들어 놓은 듯한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여, 이 사건은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며 도대체 이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궁금증을 우리는 가지게 된다. Well, generally nothing happens. 글쎄. 대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때요? 이런 것이 꽤 고급스러운 유머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유머라고 생각하고 첫페이지를 읽는데 자꾸만 가슴에서 뭔가가 올라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던 해프닝처럼 흘려 보내기가 당사자인 나는 가능할까요? 우리를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우리가 잘 되기를 응원했었기에 당신은 그 것에도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지요. 그 결말이 없어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참으로 뭐합니다. 나보다는 훨씬 현명한 당신은 아무 일도 아닌 듯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다른 행복을 찾아 내어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과거의 추억들은 시간에게 맡겨 두신다 했습니다. 마치 내가 whatthebook을 잊어버렸던 것처럼요. 이어지는 다음 내용들이 이러합니다. The inevitable catastrophe you foresaw wasn't inevitable after all, and high tragedy, without any regard to artistic decency, dwindles into drawing-room comedy. Now, growing old has many disadvantages, but it has this compensation (among, let us admit, not a few others), that sometimes it gives you the opportunity of seeing what was the outcome of certain events you had witnessed long ago. You had given up the hope of ever knowing what was the end of the story, and then, when you least expected it, it is handed to you on a platter. 어때요? 세상에나. 모옴 선생님 당신은 천재가 맞으십니다 그려.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아닌 어설픈 거실용 코메디로 전락하여 너무나도 손쉽게 그 결말이 나옵니다. 내가 겪었던, 종국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 사건을 돌이켜 보니 쓴웃음이 나서 자연스레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게 됩니다. 담배 맛이 참 몰개성적이네요. 연이어 피워대는 담배 덕에 가슴이 아픈 것이겠지요? 추석에 서울 집을 가면 창고나 차고 옆 방 한구석에서 박스에 봉인된 채로 십년이 훌쩍 넘는 동안 방치되었을 헌 책들을 다시 찾아볼까 합니다. 페이퍼북들은 모두 약한지라 곰팡이가 슬은 채로 삭아져 이윽고 펼쳤을 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바스러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갑자기 커지네요. 그런데 문득 나는 하드커버 북이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바램인가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라도 결말을 꼭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혹여 당신이 시든 꽃이 되어 있을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생각하고 당신만 쳐다볼 것입니다. 아니 그 때부터는 반드시 당신이 다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조회 256
댓글 정렬
  • 상모사곡동·

    조은글

  • 상모사곡동·

    챗 주세요.

    • 상모사곡동·

      저요?

    • 상모사곡동·

      죄송합니다. 글 작성자 분 한테 이야기 한거예요.

    • 상모사곡동·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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