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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From 김형민PD (SBS CNBC) < 좁쌀 하나의 우주, 그 안의 사랑 > 1994년 유독 많은 인물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 해 겨울 문익환 목사님이 가셨고 김남주 시인도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고 한창 더운 여름에는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추앙과 저주가 철벽으로 공존하는 이름 김일성 주석이 숨을 거뒀지. 그리고 또 한 명의 큰 인물이 이 해 5월 22일 치열한 삶을 마감했다. 장일순.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들어봤니? 오래전 지방선거에서 봤듯 같은 강원도라도 영동과 영서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말씨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생활 패턴도 다르지. 오랫 동안 원주는 영서 지역의 중심이었어. 서울에 가깝고 깊은 산에 면해 있어서 유사시 숨기도 좋다 해서 선비들이 즐겨 살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반역향’의 오명을 쓰고 강원도가 ‘강춘도’로 바뀐 적도 있어.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의 앞글자를 딴 거지만 원주 대신 춘천을 쓴 거지) 뭐 반역향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하지만 적어도 유신 정권에게 원주는 그야말로 ‘반역향’이었어. 유신 시대 가장 강력한 반유신운동의 진원지가 지학순 주교로 대변되는 원주의 민주화운동 세력이었거든. 장일순 선생은 그 핵심에 서 있었고. ‘무위당’이라는 호답게 그분은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지 아니하고 물 흐르듯 순리를 좇아 스스로를 비우면서도 ‘좁쌀 안에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사소한 것에도 창대한 이치가 숨어 숨쉬고 있음을 역설했던 그분은 20대 때 이미 아인슈타인과 교류하며 ‘하나의 세상’을 꿈꾸던 당찬 젊은이로서 원주의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우는 주역이었어. 30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협동조합도 만들고 국회의원 출마도 했지만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옥살이도 했지. 이 어처구니없는 옥고를 경험하면서 그는 일생의 진로를 바꾸게 돼. 말했다시피 70년대에는 반유신의 선봉이었고 그 이후는 생활운동과 한살림 운동을 통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게 되지. 이 분의 사상과 인식 세계를 글 몇 줄로 얘기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더구나 그 쓰는 이가 나라면 더욱 무망한 노릇이지. 그냥 일화 하나를 들어 보자. 하루는 장일순 선생한테 한 할머니가 찾아왔어. 어딘가에 쓸 요긴한 돈인데 그만 소매치기를 당했다며 하소연을 하는 거야. 장일순 선생도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사정은 딱하고..... 장선생이 한 행동은 무작정 원주 역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있는 거였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면서. 그런데 원주 바닥이 넓은 바닥도 아니고 장일순 선생도 원주바닥에서는 또르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분인지라 소문이 무성하게 났다나 봐. 장 선생이 소매치기 얘기 듣고 기가 막혀서 저러고 계신다고..... 그 며칠 뒤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서 무릎을 꿇었대.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 소매치기입니다. 돈 일부는 썼고 남은 것 여기 있습니다. 제가 돈 벌어서 꼭 갚겠습니다.” 장선생은 그를 데리고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권했대.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구만. 미안하네.”   장선생은 생전에 ‘무위’에 대해 이렇게 설파하신 적이 있다고 해. “무위의 극치는 또 어떤 거냐. 배고프다고 하면 그 사람이 날 도운 적도 없고 또 그 사람이 날 죽일 놈이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배가 고픈데 밥 좀 줄 수 있을까 했을 적에 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에요. 또 헐벗어서 벌벌 떨고 있으면 그 사람의 등이 뜨시게끔 옷을 입혀주는 것이 무위다 그 말이에요.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 건들거리고 노는 것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산 보지 않은 참마음. 그런 것이 무위지요.”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맨입’에 하는 것 자체가 몰상식하게 여겨지고 ‘뭔가 생기는 게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고 ‘기브 앤 테이크’가 인간사의 올바른 도리인양 여겨지는 사회에서 장 선생의 ‘무위’가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의 ‘상식’이 낳는 비극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을까. 52일만에 바다에서 돌아온 세월호의 조리장 아저씨는 돈까스를 튀기다가 배가 기울면서 기름통과 함께 쓰러져 부상을 입었지만 선원들은 조리실 직원들을 팽개치고 나왔지. “날 죽일 놈”도 아니었고 세 끼 밥 챙겨 주고 챙겨 먹던 사이의 사람들이었는데도, 자기들은 옷을 갈아입을 여유까지 부리면서도 그들은 함께 나가자는 손을 내밀지 않았으니까. 장일순 선생의 말은 사실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사의한 수준까지 나아간다.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르면 어쩌겠는가?”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공손하게 돌려줘. 돌려주며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하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한 예수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장일순 선생은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고 봐. 암에 걸린 뒤에도 암세포가 뭐 그리 박멸하고 싸울 대상이냐며 치료를 않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걸 보면. 이쯤 돼서 나는 그게 궁금해진다. 시인 김지하부터 녹색평론의 김종철까지 모두 ‘스승’으로 모셨고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 (이현주 목사)같은 그와 함께 한 짝은 누구였을까. 평생 가슴을 두들기며 아이고 내 팔자야를 주문처럼 외고 살진 않았을까. 죽이 맞았다면 얼마나 잘 맞았을까. 원주시 봉산동에 있는 흙담집, 장씨 형제들이 힘을 모아 지었고 지금까지도 튼튼하게 남아 있는 흙담집을 두고 장선생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대. “진짜 주인은 저 사람이야. 나는 건달이고 하숙생이고.” 여기서 ‘ 저 사람’이란 부인 이인숙 여사를 일컬음이지. 이인숙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고 당시 집도 꽤 유복했다고 해. 그런데 원주에서 교편을 잡던 대학 친구가 “원주의 인물”이라고 설레발을 치며 소개한 남자에게 시집을 오면서 팔자가 표변하게 됐어. “원주의 대통령감이라고 해서 영부인 대접을 받을 줄로 알았다”지만 그 영부인은 ‘정신적 영부인’이었을 뿐 남편이 받아야 했던 감시와 가난과 탄압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받아야 했지. <살림이야기>2014년 6월호에 실린 김선미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삶이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연속이지. 그걸 푸는 게 이 양반은 약주 자시고 ‘아침이슬’ 부르며 펑펑 우시는 거야....... 아니, 당신 그렇게 우셔서 어떻게 큰일 하시냐고 내가 뭐라고 그랬지. 근데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보니 남자도 울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더라고. 난 그걸 몰랐지.” 이런 인터뷰를 보면 <아침이슬>이든 뭐든 개인적인 괴로움 아닌 사회적, 역사적 아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부르면서 울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준 사람들한테 참 고맙다. 장일순 선생의 흙담집 근처에는 파출소가 있는데 이 파출소는 오로지 장일순 선생을 감시하기 위해서 지어졌다고 해. 유신이라는 희대의 독재 체제 아래에서 죄없는 사람들이 목이 매달리고 배를 가르고 곤죽이 되도록 두드려 맞던 시기, 그 세월과 정면으로, 그리고 주축으로 맞서면서 얼마나 힘겨웠을지. 그 괴로움을 베갯머리에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부르며 꺽꺽거리며 우는 남편과 그걸 달래고 때로는 핀잔을 주다가 결국 함께 울어버리는 아내를 상상해 보렴. 장일순 선생은 집안 내력상 술을 먹지 못했대.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밥상 술상을 같이 했고 안받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마셨다지. 못 먹는 술 먹은 뒤에 왝왝 토해 대는 남편을 보다 못해 아내가 제지하기도 했지만 장일순 선생은 “권하는 것도 막는 것도 다 애정이지.” 하면서 넘겼다고 해.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감시하던 기관원 포함해서) 사람들 밥상을 차리려 질경이풀 뜯으러 다녀야 했고, 어떻게든 그 밥상을 차려 냈고. 하지만 이인숙 여사는 그를 타박한 적이 없었다는군. 별 수 없는 부창부수. 그 남편에 그 아내. 이웃집 공자를 몰라본다고 우리는 가끔 우리와 가까운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 가운데 예수처럼, 성자처럼 살다 간 사람들에게 합당한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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