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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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은
애초에 정해진 바탕이 없다.”ㅡ

일찍이 東坡(동파)는 자신의 시에서
“行雲流水(행운유수), 初無定質 (초무정질).” 이라 하였다.
누구도 바다의 고향을 묻지 않는다.
바다의 고향은 강이었고
개천이었고 계곡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황지우 시인은 말했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돌아보면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길’이 보이지만,
앞을 보고 걸을 때
‘가야했던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처 없는 길이었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다.
오직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비록 경로를 이탈한
변방의 아웃사이더에 불과 할지라도
무의미한 인생이란 없다.
세상의 ‘경로’란 것도
세속이 만들어 낸 관습과 문화일 뿐,
모든 인생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고정 불변의
정언명령은 아니다.

모든 꽃이 반드시 봄에 피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도 피고 가을에도 피며
심지어는 겨울이 돼서야 피는 꽃도 있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가 자라는 속도가 다르듯
저마다 인생의 봄은
이렇게 서로 다른 법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자.
어차피 세월은
흘러갔고
구름은
소멸할 뿐이다.
바다에게 고향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새는 날면서 뒤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나그네는
갈 길이 남아 있을 때
행복한 법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갈 수 없었던 길이 아니라
가기가 두려워 회피한 길이다.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후회는
쉬운 길을 선택했던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가지 못한 길을 뒤돌아보는 자보다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자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것이 길을
‘아는 자’와
‘걷는 자’의 차이이다.

누구나 인생을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살고 싶지만,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삶이 훨씬 더 아름답다.
어쩌면 행복이란
목적지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가는 여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 여정의 한 길목에 서 있다.
루쉰이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길’은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흔한 말입니다.
나는 이상하게 이 한 글자 단어(單語)가
오래 전부터 참 좋았습니다.
그 어감이 입에 착 감깁니다.
긴 세월(歲月) 참 친구(親舊)처럼
다정(多情)하게 긴 여운(餘韻)을 줍니다.
‘에움길’
이 뜻을 모르는 이도 많을 거 같습니다.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 이라는 뜻입니다.
둘레를 빙
'둘러싸다’ 는 동사(動詞)
‘에우다’에서 나왔습니다.
지름길은 질러 가서 가까운 길이고,
에움길은 에둘러 가서
먼 길입니다.

‘길’은 순수(純粹) 우리말입니다.
한자(漢字)를 쓰기 전부터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라(新羅) 향가(鄕歌)에도 나옵니다.
길을 칭하는 말들은
거개가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길 이름에는 질러가거나
넓은 길보다 돌아가거나
좁고 험한 길에 붙은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생사(人生事)처럼 말입니다.
집 뒤편의 뒤안길,
마을의 좁은 골목 길을 뜻하는 고샅(길),
꼬불꼬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
거칠고 잡풀이 무성(茂盛)한 푸서릿길,
좁고 호젓한 오솔길,
휘어진 후밋길,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자드락길,
돌이 많이 깔린 돌서더릿길이나 돌너덜길,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자욱길,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벼룻길...

숫눈길’을 아시나요?
눈이 소복이 내린 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대의 첫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입니다.
‘길’이란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참 문학적(文學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이고 사유적입니다.
‘도로(道路)’나 ‘거리(距離)’가 주는
어감(語感)과는 완전(完全) 다릅니다.
‘길’은 단순(單純)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 다니는 것만을
의미(意味)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이 없다” 거나
“내 갈 길을 가야겠다”라는 표현(表現)에서 보듯
길은 삶에서의
방법이거나 삶 그 자체입니다.

영어 ‘way’도 ‘street’와 달리 같은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서양(西洋) 사람들도 길에서
인생을 연상하는구나 싶어 신기(新奇)했습니다.
불교(佛敎)나 유교(儒敎),
도교(道敎) 등
동양(東洋) 사상(思想)에서의
공통적(共通的) 이념(理念)도
도(道)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평생(平生)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헤매고,
누군가는 잘못된 길로 가고,
누구는 한 길을 묵묵히 갑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탄탄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습니다.
세상(世上)에 같은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프랭크 시내트라에게는
“Yes, it was my way” 였고
“I did it my way” 였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그 유명(有名)한 흑백(黑白) 영화(映畵)
‘길’(LaStrada,1954년)을 기억(記憶)할 것입니다.
야수 같은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와
순진무구(純眞無垢)한 靈魂을 가진
젤소미나 (줄리에타마시나)는
평생(平生) 서커스 동반자(同伴者)로 길을 떠돕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場面),
자기(自己)가 버린 젤소미나의 죽음을 알고
잠파노는 짐승 처럼 울부짖습니다.
길이 끝나는 바닷가에서 입니다.
애절(哀切)하게 울려 퍼지는
니노 로타의 그 유명한
트럼펫 연주(演奏) 테마 음악(音樂)...
영화와 제목(題目)이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미국인(美國人)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詩人)
로버트 프로스트는 명시 ‘가지 않은 길’에서
이렇게 술회(述懷)했습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길은 목적지(目的地)에 가기 위해서도
존재(存在)하지만
떠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길을 간다’ 라는 말보다
‘ 길을 떠난다’ 는 말은 왠지 낭만적(浪漫的)이거나
애잔하거나 결연합니다.
결국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거나,
고행(苦行)의 길이거나,
득도(得道)의 길이거나,
산티아고 길이거나,
바이칼 호수(湖水)의 자작나무 숲길이거나,
동네 둘레길이거나 ~~
우리네 인생이 곧 길이요,
우리의 발이
삶입니다.

 
결국은 ‘마이 웨이’를 가는 겁니다.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에움길로 돌아서 갈 것인가.
인생길은 결국은 속도(速度)와
방향(方向)의 문제(問題)입니다.
지름길로 가면 일찍 이루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누락(漏落)되고
생략(省略)되는 게 많을 것입니다.
에움길로 가면
늦지만 많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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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2

여미지
최짬뽕
홍천군 홍천읍

깊은 공감 ..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현재도 미래도 에움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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