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로 이용우 원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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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로 이용우 원화 작품

가구/인테리어 ∙

500,000원

묵로 이용우 作 ( ***-****-**** )

액자 50.5 x 126
그림 33.5 x 95

유명작가의 작품을 원화로 소장해보세요~~^^

근현대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호는 춘전(春田) · 묵로(墨鷺),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02년 5월 26일 음력 서울 종로구 당주동 131번지에서 이종국(李鍾國)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은 구한말에 경시(警視)를 지냈으나, 3.1운동 후 함경도로 전근되면서 그만두고 중개상을 했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여 부친의 배려로 1911년 10세의 나이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서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3년간의 강습기간을 마친 후 스승인 안중식에게 '춘전(春田)'이라는 호를 부여받았다. 1914년 3월 31일 오일영 · 이한복과 함께 서화미술회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설립되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용우의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는 같은 서화미술회 출신인 오일영과의 합작으로 1920년 창덕궁 대조전 벽화제작을 의뢰받아 그린 <봉황도>가 있다. 이 작품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내의 화재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희정당(熙政堂)의 보수계획에 의해 의뢰받은 것으로, 김규진 · 이도영을 비롯한 당대의 대가들을 비롯하여 같은 서화미술회 출신인 오일영 · 김은호 등의 신진작가들도 참여했다. <봉황도>는 작가의 창의성과 개성보다는 장식적인 궁중장식화본을 충실히 따른 것이지만 치밀한 구도와 채색, 필선의 표현기량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초기의 이용우의 화풍은 전통적인 산수화의 구도와 돌기 모양의 산형, 무수한 태점들이 찍힌 표현법 등 스승 안중식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이는 1922년 개최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출품작 <고성춘심도(古城春深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용우가 새로운 화풍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은 1923년부터였다. 이상범 · 노수현 · 변관식 · 이용우 4인은 1923년 3월초 맴퍼드 상회 주인이자 서화협회 명예회원이었던 이상필(李相弼)의 후원으로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산수화의 개혁에 앞장서고자 했다. 동연사 동인 네 사람은 죽첨정(竹添町)에 사무실을 두고 교유하였으며, 산수화에 대한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1923년 4월에 열린 제3회 서화협회전과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출품작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들의 작품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와 『개벽』에서는 종래 볼 수 없었던 사생적 작풍으로 화단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난 뒤의 첫 솜씨라며 크게 주목했다. 특히 이용우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새로운 회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했던 화가로, 실험성강한 작품을 잇달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전통 산수화에 새로운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서양화풍과 전통화풍이 결합된 듯한 대담한 시도는 주로 1920년대에 제작된 산수화에서 추구되었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무제(失題)>라는 작품은 이용우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 제목 역시 서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삼원법에 의한 관념적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부감법이라는 새로운 시점을 적용한 실경적인 산수화를 선보인 것이다. 조선미술전람회 4회전(1925)에 출품한 <흙의 향기(土の薰り)>나 6회전(1927)에 출품한 <바다(海)>는 당대인들의 혹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산수화의 구도법에서 탈피한 서양화적인 풍경화를 시도한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7회전(1928)에 출품한 <제7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실험적인 시도를 볼 수 있다. 표현법에서도 산세의 묘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선보다는 면적인 표현법을 강조하였다. 채색도 전통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흑백의 작품사진만 전해지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그림평에서 이승만(李承萬)이 "지방 순회극단의 배경 그림 같다"고 한 평이 참고가 된다.
'예술보다 명성이 먼저 천하에 이름을 떨친 감이 없지 아니하다'라는 혹평을 들었던 이용우는 1926년 무렵부터 호를 춘전(春田)에서 묵로(墨鷺)로 바꾸고 작품 출품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낙선하자 좌절하고 조계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심취하거나 동료들과 음주와 유랑을 하며 4년간 떠돌아다녔다. 이용우가 작품 제작을 다시 시작한 것은 조선미술전람회 제12회전(1933)부터로, 이 해 <추산유거도(秋山幽居圖)>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아 작품활동을 재개하였다.
1930년대의 작품은 일본인 화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류의 감각적인 남화풍(南畵風) 산수화로 대변된다. <계산형효도(溪山炯曉圖)>(1934), <산훈협수도(山曛峽秀圖)>(1935), <산정사한도(山靜寺閑圖)>(1936) 등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들을 통해 살펴본 1930년대의 작품은 세련된 기법과 감각적인 신남화풍(新南畵風)의 산수화들로 나름 시류에 부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용우의 화법이 일본화풍을 극복하고 실경미가 돋보이는 새로운 화풍으로 재차 변모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로, <산가(山家)>(1939)나 <시골풍경> 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원숙하고 활달한 필치와 대담하고 산뜻한 색채, 풍경화적인 요소가 화면 가득히 배치된 산수화는 오늘날 이용우를 근대기를 대표하는 산수화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가 된다. 특히 <시골풍경>은 부감법으로 농가의 풍경과 마을 전체를 조망하였으며, 시골 아낙의 모습과 전답, 물레방아 등 전원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담아내었다. 색채의 강한 대비감은 서양 풍경화를 연상시키지만 전통 산수화 특유의 적묵법의 힘찬 터치가 잘 조화된 수작이다.
이용우는 산수화 뿐 아니라 화조화 방면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전통적인 화조화의 구도법과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과감하고 활달한 필치와 산뜻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화조화를 남겼는데, 그의 호방한 필법와 대담한 색채는 산수화에서보다 화조화에서 더욱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10세의 이른 나이에 서화계에 입문하여 기량을 인정받았던 이용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과 세필(細筆)의 정교한 그림과는 거리가 있어, 섬세한 미인도를 즐겨 그렸던 김은호와 종종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애주가로 풍류를 즐겨 술을 마시면 작품을 남발하여 작품간의 수준차가 심했으며,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화단의 기인(奇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1940년 조선미술관에서 주최한 '10대가 산수풍경화전'에 초대되어 <관폭(觀瀑)> 등을 출품했으며, 이때부터 전통화단의 '10대가' 대열에 들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제1회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주로 피난을 갔다.
1952년 부산에서 연말에 예정된 개인전 작품 제작에 열중하다 11월 11일 음력 9월 24일 뇌일혈로 사망했으며, 1953년 1월 부산 국제구락부(國際俱樂部)에서 문교부 후원, 대한미술협회 주최로 유작전을 열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정신으로 보수적인 전통화단의 흐름을 타파하고자 한 이용우의 시도는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82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서울세종문화회관에서 이용우 30주기를 기념한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상범 · 변관식 · 노수현 등과 함께 근대기 전통화단을 이끌었던 화가로서 평가가 이루어진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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